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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의 오늘과 숨은 보석

1. 소공동의 숨은 역사: 환구단에서 걷는 시간의 궤적소공동은 한때 왕실과 깊은 연관을 가진 공간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며 제천의례를 올렸던 환구단이 자리한 곳이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천제 제단으로, 황제 권위를 상징하는 핵심 시설이며, 현재 일부 남아 있는 황궁우와 돌북 등 구조물은 당시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상업화 과정을 거치며 주변 풍경은 변했지만, 골목과 작은 건물 속에는 여전히 역사적 흔적이 살아 있다. 소공동 골목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흔적, 오래된 돌담과 건물 구조, 왕실과 연결된 지명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동네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기반이다. 이러한 역사적 요소들은 단순한 상업지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며, 골목길을 따라 걸을 ..

환구단 이야기 2025.08.14

근현대 소공동: 호텔과 상권의 이야기

1. 환구단 옆에서 시작된 100년의 이야기 — 조선호텔의 변신과 확장1914년 10월, 소공동 환구단 일부 터에 ‘조선호텔’이 문을 열었다. 대한제국 시절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이 있던 자리였던 만큼, 개관 초기부터 이곳은 단순한 숙박시설이 아니라 ‘근대적 환대(歡待)의 공간’이자 조선의 대외 창구로 기능했다. 일본 철도청이 건립한 이 서구식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였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프랑스식 레스토랑 ‘팜코트’(현 나인스게이트), 서양식 뷔페 ‘갤럭시’(현 아리아) 등 당시 조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현대식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조선이 국제무대에 발맞추려는 상징적 행보로 해석된다. 건축 설계는 독일계 건축가 게오르그 데 랄란데(Georg de L..

환구단 이야기 2025.08.13

소공동과 환구단의 역사적 풍경

1. 소공동의 지리와 이름 유래서울의 중심부, 중구에 자리한 소공동은 동남쪽으로 남대문로, 서쪽으로 태평로, 그리고 북쪽으로 을지로와 접해 있는 중요한 지역이다. 오늘날 소공동은 금융기관과 백화점, 고급 호텔들이 밀집한 상업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역사는 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공동이라는 이름은 한자 그대로 ‘작은 공주 골’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조선 태종의 둘째 딸인 경정공주와 깊은 연관이 있다. 경정공주의 부마였던 조대림의 집이 현재 웨스틴 조선 서울 호텔이 위치한 자리에 있었는데, 이 집터 주변 지역을 ‘작은 공주 골’이라 부르다가 이를 한자로 표기해 소공동(小公洞)이라 명명한 것이다. 경정공주가 살던 이 집은 단순한 사저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명나라 사신..

환구단 이야기 2025.08.12

근대와 현대가 만나는 공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과 환구단 역사 여행

1.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근대 역사와 현대 미술의 만남덕수궁 내 석조전과 그 옆에 위치한 석조전 서관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품은 건축물이다. 석조전은 고종 황제가 근대적 국가로서 대한제국의 위상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1900년대 초 착공한 서양식 석조건물이며, 서관은 1938년 완공되어 ‘이왕가미술관’으로 개관하여 조선 왕실 문화재를 전시하였다.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와 문화 정책의 산물이기도 한 이 공간은 오늘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새롭게 단장되어 한국 근대미술의 중심 전시장으로 거듭났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서울 중심부의 역사적 공간에 자리 잡아,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독특한 문화적 장을 제공한다. 전시 공간으로서의 덕수궁관은 구한말, 일제강점기, 광복 직후 시기까..

환구단 이야기 2025.08.11

서울 속 작은 세계 – 정동과 주변 외국 공관 거리

1. 표현 방식 속 외교의 거리19세기 말, 한양의 서쪽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 정동(貞洞)은 불과 수십 년 만에 조선의 국제 외교 중심지로 급격히 변모했다. 덕수궁을 둘러싼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전통 한옥과 기와지붕 대신 붉은 벽돌과 첨탑, 아치형 창문을 갖춘 서양식 건물들이 곳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서울 한복판에 유럽과 미국의 도시 일부가 옮겨온 듯한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당시 기록과 사진 자료에 따르면, 정동 일대에는 러시아 공사관의 붉은 벽돌과 탑이 인상적이었고, 영국 공사관 등은 유럽식 건축 양식을 띠었다. 미국 공사관저의 경우 초기에는 현지 한옥(목조 가옥)을 매입해 사용했으며, 이후 점차 서구식 요소가 가미된 건물로 변화해 갔다. 이러한 건축 양식의 혼재는 단순한 미관의 변화가..

환구단 이야기 2025.08.10

덕수궁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1. 경운궁(慶運宮)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환구단의 여파와 황궁의 재배치1897년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며 조선 왕조를 넘어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선언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일본, 청나라 등 강대국 사이에서 조선이 자주국으로서 위상을 요구하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칭호 변경을 넘어 국가 주권과 근대화를 향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시 거처를 옮겼다가, 1897년 돌아와 경운궁을 황궁으로 삼았다. 경운궁은 원래 조선 후기의 작은 궁궐이었으나, 정동 일대에 자리 잡아 당시 근대 외교의 중심지와 가까웠다. 이에 따라 고종은 경운궁을 ‘근대 국가의 얼굴’로 만들고자 궁궐 내에 서양식 서재와 근대적 사무공..

환구단 이야기 2025.08.09

환구단에서 정동까지 – 근대 서울 역사 여행 코스

1. ‘제국’의 공간, 환구단에서 역사를 만나다지난 30편에서 우리는 ‘제국’이라는 말이 근대 한국 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그 낯설고도 강력한 단어가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 선포를 통해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지 살펴보았다. ‘제국’은 단순한 명칭을 넘어 당시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근대 국가의 정체성을 의미했다. 특히 이 개념은 고종 황제가 환구단에서 거행한 황제 즉위식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현실로 구현되었다. 환구단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장소로, 당시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고종의 의지가 함께 담긴 근대 국가의 출발점이었다. 이곳은 단순히 제사를 지내던 제단을 넘어서 근대 국가로서 새로운 자존과 위상을 세상에 선포한 상징적 공간이..

환구단 이야기 2025.08.08

‘제국’이라는 말이 낯설었던 사람들 – 언어와 용어 수용의 역사

1. 새로운 말들, 낯선 개념 – 용어 변화가 시작되다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며 대한제국이 선포되었다. 이로써 정치 체제는 물론이고, 공식 용어 체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기존에 사용되던 ‘왕’이라는 호칭은 ‘황제’로 대체되었으며, ‘전하’는 ‘폐하’로 바뀌었다. 조선이라는 국호도 대한으로 변경되어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언어로 명확히 표현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명칭 변경을 넘어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임을 천명하는 상징적 의미가 컸다. 관보와 법령, 외교문서 등에서 '황제 폐하의 칙명으로', ;칙령 제○호', '대한제국 황제의 탁지부'와 같은 공식 표현이 빠르게 확산하였다. 갑오개혁을 통해 이미 사용되던 ‘외부’, ‘내부’, ‘탁지부’, ‘군부..

환구단 이야기 2025.08.07

제국 선포 이후의 공간 변화 : 시각적·행정적 재편

1. 환구단, 공간 전환의 기점이 되다1897년 10월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의 수립이 공식적으로 선포되면서, 단순한 정치 체제의 변화만이 아니라 국가의 공간 질서에도 중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환구단은 그 자체로 ‘천제(天祭)’를 통해 하늘의 뜻을 받들어 황제가 통치 정당성을 부여받는 장소로 기능했다. 즉위식과 제천의식이 함께 거행된 이 공간은 기존 유교적 제례 체계와는 명백히 구분되는 제국적 공간으로 재해석되었다. 그동안 종묘와 사직, 문묘 등 유교적 정치 질서의 공간이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을 상징했다면, 환구단은 황제국 체제의 정통성과 우주적 권위를 상징하는 새로운 축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후 환구단은 제례 공간으로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황제의 권위가 시공간적으로 드러나는 상징적 무대로 자리 잡았다...

환구단 이야기 2025.08.06

대한제국 선포 이후의 국내 담론 – 지식인과 시민사회의 반응

1. 독립협회, 대한제국 수립을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해석하다1897년 10월 고종이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언하자, 독립협회는 이를 자주독립 국가 수립의 상징으로 강하게 지지했다. 독립협회는 1896년 창립 이래 『독립신문』을 통해 조선이 청의 제후국 체제를 벗어나 ‘황제 중심의 자주국’으로 전환했음을 반복적으로 전파하였고, 이는 독립협회의 정치·사회적 목표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독립신문』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가 고대 삼한의 역사 위에 새로운 자주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강조했으며, 황제 즉위는 외교적 독립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정치적 선언으로 해석되었다. 단순한 호칭 변경이 아니라, 국가의 주권과 정체성을 새롭게 구축하는 중대한 전환점으로 본 것이다. 특히 이들은 대한제국..

환구단 이야기 2025.08.05